관수루로 들어선 구연서원의 풍경
수승대를 중심으로 양편에 요수정과 관수루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 관수루 아래로 들어서면 구연서원(龜淵書院)이
넓은 앞마당을 앞에 두고 그 중심을 잡고 있다.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는
관수(觀水)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뚯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 소재지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세워서 고을의 현감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일정한
날을 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 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들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 되기 때문에
사찰의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 누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 팔작지붕이고,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일부러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거창지역 누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 안내문의 내용 인용 -
여느때와 같이 안내문의 도움을 받고
관수루를 통해 구연서원의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넓은 앞마당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오전에 내린 비로 질퍽거리지만
땅을 밟는 그 기분은 오히려 평안한 느낌이다.
거대한 귀부와 비석들이 우측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그리고 그 뒤로는 구연서원에서 제향시에
제수를 준비하고 차리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고 있다.
관문을 통과하듯 그렇게 구연서원으로
다가선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은
1694년(숙종 20년)에 지방유림이 신권(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으며,
서원 터에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만 남아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
전후좌우 어느 면을 보아도
잘 보존된 상태이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은 고스란이 남은 모습들...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건재한 목재건물인 우리 한옥의 모습에
경이로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것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의 흔적과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느끼고 다시 관수루를 향한다.
구불구불한 나무기둥과
큰 거북형상의 바위위에 활주를 세워논
그 모습을 다시 살펴보며...
그리고 무주로 달리기 위해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오전에 온 비로 눈은 많이 녹았겠지만
향적봉의 상고대를 만날수 있을 것이란 작은 기대를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