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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3기(奇) 8괴(怪)와 3보(寶)
    산행정보 및 기타정보/휴식·기타정보 2012. 9. 7. 20:03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문화의 도시로 남산 등지에 많은 보물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특히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 또는 노천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보물과 문화재가 발길 닿는 곳마다

    자리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 신라의 전설을 집약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3기 8괴와  3보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1. 3奇

    신라 3기는 3가지 기이한 것이란 말로 금척(자), 옥저(만파식적 萬波息笛), 선덕여왕의 구슬(화주)이라고도

    하고  선덕여왕의 화주대신, 성덕대왕신종 또는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포함한다는 설도 있다.

     

      

    1) 금척(金尺)

             금척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으로 된 자라고 한다.

          이 자는 병든 사람을 자로 재면 병이낫고 죽은 사람을 자로 재면 살아나고 하는 신비한 자였는데, 중국에서

           빌려달라고 하여 이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 건천읍 지역에 30개의 똑같은 무덤을 만들어 그 속에 묻어 버렸

           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시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금척리에 여러개의 무덤이 있는데, 그 곳이 경북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소재 사적 43호로 경주 서쪽 7~8km 지점에 32기의 대형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에 52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32기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때 고분을 파내려고 곡괭이질을 하면 천둥번개가 치고하여 왜놈들도 금척리 고분을 손을 대지 못했

          다고 전해 지기도 한다.

          1952년 그 고분군 중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금귀걸이, 옥류,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일제시대만해도 52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하나지금은 32기가 된다고 함.

       

      2) 옥적(玉笛/만파식적 萬波息笛)

          신라 31대 신문왕(681~692년)이 감은사에 행차한 뒤에 이견대에 들렀는데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쳤는데,

          이 해룡의 말에따라 바닷가에 떠있는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 했는데 그 뒤 적군이

          쳐들어 오거나 병이 났을때 또는 가뭄이나 홍수가 나거나 태풍이 불어올 때 이 피리를 불면 모두가 평정이 되었

          다고 하여 이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도 동해의 용왕이 신라왕에게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한문건(1765~1850)

          이란 자의 글에 의하면 고려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했으나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奇物)로 여겼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만파식적은 신라의 문무왕이 화한 용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나타나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신문왕

          에게 보냈다고 하는 피리이며 이옥 적의 소지자는 1975년 당시 포항경찰서에 근무한적이 있는 전직 경찰관으로

          부터 구입 30년간 보관해 왔으며 그 전직 경찰관은 일제시대 경성에 머물던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3) 화주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수정구슬인데 분황사 석탑에서 나와 백률사에서 보관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알수 없다고 한다.

          광선을 구슬에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돋보기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한다.

     

     

      4) 성덕대왕신종(에밀래종)

       

    화주가 3기 중에 포함 되지 않을 경우 이 성덕대왕신종이 3기에 포함 될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국보 제 29호로 771년 높이 333cm, 입지름 227cm으로 만들어졌으며,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른다.


    원래 경주 봉덕사(奉德寺)에 있던 것을 영묘사(靈妙寺)로 옮겼다가, 1915년 8월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되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중에 가장 큰규모이며 완전하게 한국 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종의 몸체에 새겨진 긴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동(銅) 12만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혜공왕이 뜻을 받들어 771년(혜공왕 7)에 완성했다고 한다.

          

     

    2. 3寶

    신라 3보는 진평왕의 천사옥대 황룡사 장륙존불상, 황룡사 9층목탑을 말하는데, 

    여기서 3가지를 신라의 3보로 분류 한 것으로 보아  3기에는 금척, 만파식적, 성덕대왕 화주 또는 선덕여왕 신종이

    포함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후에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꾀하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보배가 있으니 범하여서는 아니된다.

    하였는데 그것은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셋째이다.

    경순왕 김부는 왕건에게 항복할 무렵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왕건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1) 진평왕의 천사옥대      

      신라 26대왕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다.       

    성은 김씨이며 579년 8월에 즉위했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한다.       

    다음은 삼국유사에서 나온 천사옥대에 대한 내용이다.       

    왕이 천주사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섬돌 두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돌을 옮기지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돌이다.      

    왕이 즉위한 원년 천사가 대궐뜰에 내려와 "상제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왕이 꿇어 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나 종묘제사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2) 황룡사 장륙존불상



     장륙존불상은 573년 진흥왕때 시작해서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라 최고의 보물로 숭앙 받아 왔다.

    이 불상은 고려때 몽고의 침입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불상의 좌대들만 남아있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보낸 황금과 동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무게는 3만 5007근인데 황금이 1만198분, 두 보살은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으며, 장륙상의 높이는 1장 6척이므로 약 4.5m의 우람한 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의해 석가 삼존상으로 중앙에 석가불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판단된다.
     ▼ 장륙존불상의 좌대

     

       

      

    3) 황룡사 9층 목탑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에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 연못가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황룡사의 용은 나의 아들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하였다고 했으며,
    자장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선덕여왕이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탑을 만들게 하였다 한다.

    탑을 구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위함으로 제 1층은 일본, 제 2층은 중화, 제 3층은 오월, 제 4층은 탐라, 제 5층은 응유, 제 6층은 말갈, 제 7층은 단국, 제 8층은 여적, 제 9층은 예맥을 제압하는 것이다.

    조성된지 50년이 지난 698년에 벼락을 맞고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기록이경문왕 13년(873년) 탑을 재건할 때 넣어둔 사리함내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불타버린 뒤 중수되지 못하고 지금은 초석과 심초석만 남아있다.
    신라와 고려 두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6차례 중수 되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양식을 알수 있는 것으로 한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이며 탑의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다. 이높이는 요즘 건물로 30층은 될 높이다.
    ▼ 황룡사지9층목탑 복원 조감도


     

    3. 8怪

    8괴는 경주에 있는 8가지 괴이한  것이란 말인데,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到沙), 계림황엽(鷄林黃葉), 금장낙안(金丈 落雁), 백률송순(栢栗松筍), 압지부평(鴨池浮萍), 나원백탑(羅原 五層 石塔), 불국영지(佛國影池)를 말한다.

     

       1) 남산 부석(南山浮石)


    남산 부석은 경주남산에 떠 있는 바위를 말하며 버선을 거꾸로 세어놓은 것처럼 보여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남산 국사곡 능선 위에 큰바위 하나가 작은 바위돌을 다리삼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있는데 금방이라도 떨어질것 같이  그야말로 떠있는 형상이다.

    명주실을 바위 뒤로 넘겨앞으로 끌어당기면 명주실이 끊어지지 않고 통과 한다고 하여 바위가 떠있다고 생각했기에 부석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2) 문천도사(蚊川到沙)


     여기서 문천은 남천을 말하는데, 흐르는 물이 너무도 맑고 고와서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예로부터 모기내 또는 물개(모래)내라고 불렀다.
     
     

     

      

    3) 계림황엽(鷄林黃葉)

      계림의 나뭇잎은 움이트면서부터 붉은 색을 띄는것이 신비롭다.
    계림숲은 가을이 아닌  여름에도  잎사귀가 누렇게 변한다.
    신라왕조의 조상이되는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가을이 아니라 여름에도 단풍이진다는 것 최치원이 이것을 보고 신라의 쇠망을 알았다고 하며, 곡령청송(鵠嶺靑松) 계림황엽(鷄林黃葉)이라는 글(참언讖言 - 앞 일을 내다보고 예언하는 말)을 썼다고 하는데, 곡령은 고려를, 계림은 신라를 의미하며 신라는 누런 나뭇잎 처럼 국운이 시들어가고 고려는 푸른 솔처럼 국운이 흥기 할 것이라는 말로 예언을 했다고 한다.

     

      

    4) 금장낙안(金丈 落雁) 

    경주시 석장동에 있는 병풍처럼 놓여 있는 수직암벽이 있는 그 곳을 금장대라고 한다.
    그 앞쪽 형상강 상류인 서천과 더불어 경치가 좋아서 예로부터 지나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떼를 지어 내려 앉았다고 하는데 한번 앉으면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금장대의 풍광이 수려하고 물이 맑아 지나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이곳에 내려 앉아서 쉬고 간다고 하는 곳으로, 신라때 귀족의 딸인 예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두고 단오절에 친구들과 금장대의 소나무에서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은 후부터 매년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났다고 하는 설과 김동리소설 무녀도에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신라 20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기생인 예기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 것이 예기청소(藝技淸沼)다.
    장대는 옛 선사시대 부족민들이 바위에 그림을 그려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고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의 직벽에 사람 발자국, 여성 생식기, 배, 사냥하는 모습 등의 암각화가 이를 추정케 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암각화 중 한 유적내의 문양갯수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1994년 이곳의 수직 암벽에서 암각화의 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예기청소(藝技淸沼)와 금장낙안
    으로 유명한 곳이다.
    ▼ 금장대(정자)
       ▼ 금장대암각화

     

       5) 백률송순(栢栗松筍)

           토종 소나무는 베면 순이 자라나지 않는데 백률사의 소나무는  이차돈의 순교 탓인지 모르지만 백률사 부근의

            소나무는 베어도 순이 돋아 나왔다고 하여 생긴 말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백률사 부근에는 울창한 대 숲이

            있었고 이 지방의 대나무는 가느다란 것 뿐인데 이곳 백률사에 나는 대나무는 굵은 종류의 대나무가 많아 한꺼

            번에 돋아나서 송화가루가 날리는 송순과 같아서 그 정경을 찬미하여 "백률송순"이라고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6) 압지부평(鴨池浮萍)

     



    안압지의 물위 에 말밤이라고

    하는 이끼같은 풀이 뿌리가 없이 자라고 있는데 이것을 압지부평이라고 한다.

     

     

     

       7) 나원백탑(羅原里五層石塔)

     

    ▼ 나원리오층석탑



    국보 제 39호 나원리오층석탑은 나원리 절터에 남아있는 석탑으로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어 이를 "나원백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불국영지(佛國影池)

            

     

     ▼ 석가탑과 다보탑
    석가탑의 그림자가 영지에 비치기를 아사달과 아사녀가 기다렸다는 전설로  영지에는 날이 맑으면 불국사의 전경이 물에 비쳐 보이는데 다보탑만 보이고 석가탑은 비치지 않으로 사람들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부른다. 백제에서 서라벌까지 신라불국사의 건립을 위해 초청되어왔던 연인이그리워 연인 아사녀가 찾아왔는데 신성한 일을 하는 동안 아사녀를 만날 수가 없는 아사달이 말하기를 일이 끝나게 되면 영지에 불국사의 탑이 비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아사녀는 영지에 가서 매일 영지를 쳐다보며 불국사 공사가 마무리 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그러던 어느날 영지에 정말 불국사의 탑이 영지에 비쳐 비친 탑을 보고 너무 기뻐서 환호하다가 물에빠져 죽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공사를 마친 아사달이 영지로 왔더니 아사녀의신발만 못가에  있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기다림에 지쳐서 물에빠져 죽은줄 알고 같이 영지에 빠져 죽었는데 그후로 다보탑은 영지에 비치는데 석가탑은 비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탑을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고 즉 무영탑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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